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시앵 레짐 (문단 편집) ==== [[갈리아]] 교회주의 ====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아비뇽 유수 등 아예 '애완 교황'까지 만든 걸 보면 감이 올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이단심문이 일어날 수가 없었고, 교황이 내린 결정사항도 일단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이고 분립을 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군주'''는 멀리할 수 없는 강력한 동맹이었으므로 암묵적으로 유지되었다.[* 한동안 저 포지션은 스페인이었으나,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선 [[펠리페 5세|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혁명정부와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이는 앞의 고위 성직자/수도자 부분과 시너지 작용을 일으켜 문제가 된다. 신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헌금이 교구에서 교구장까지 올라가면, 교구장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 고위 성직자들을 끝으로 흐름이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헌금이 로마 교황청까지 도달한다면, 교구 단위까지 지원을 보내라는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외부의 압력이라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반면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서는 하급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17세기]] 대항종교개혁 이래로 귀족들이 고위 성직을 돌려먹지 못하게 지속적으로 [[칙령]]을 내렸고 스페인은 교황청의 칙령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